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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신문] [김구용국 칼럼] 유월에 부르는 ‘5월 예찬’

작성자 : 아시아문화연구원 날짜 : 23/06/19 10:26 조회 : 52

[김구용국 칼럼] 유월에 부르는 ‘5월 예찬’

김구용국 | 기사입력 2023/06/19 [07:44]

 

▲ 김구용국 문학박사     ©수원화성신문

 

오월을 보내고 유월을 맞았다. 가정의 달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장미꽃이 피어난 까닭도 있었다. 가지를 정리하며 장미꽃이 담장을 따라 피어나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다렸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보상하듯 장미꽃은 담장을 따라 어여쁘게 피어났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오월은 보너스와 같은 달이었다. 설과 추석을 제외하고 무엇인가 선물에 대한 기대, 용돈에 대해 기대를 할 수 있는 오월이었기에 오월을 설레는 달이었다. 늘 그렇듯 예상은 빗나가기도 하였고 의외의 보상이 따르기도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의 어린이날이 나에게 평생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그리워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스무 살의 어린이날이었다. 어머니께서 나들이를 하러 가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통닭을 튀기고, 소주를 사시고는 팔달산으로 향하셨다. 그리고 화서문 근처 언덕에 올라 자리를 폈다. “얘, 그간 어린이날이라고 변변한 선물도 못 해줬다. 미안하다. 소주 한잔 먹고 섭섭한 점이 있었더라도 풀어라.” 그 뒤로 내게는 어린이날이 없었다. 평생 가장 강력한 어린이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어버이날을 기억하고 챙겨야 하는 나이였다. 그 해부터 스무 살의 어버이날부터 나는 열심히 어버이날을 챙기고 기념하였다. 용돈도 드리고, 선물도 드리고 외식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 나는 아버지가 되어있었다. 이제는 조카들과 내 아이들의 어린이날을 챙기는 위치에 있었다. 근교의 사찰이나 유적지, 유원지를 다니면서 이날을 기념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이 아이들도 어느덧 자라 성인이 되었다. 나의 딸도 결혼하였고 사위도 생겼다. 이렇게 내게 어린이날은 또 저만큼의 거리에 있다.

 

이렇게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성장하는 사이 부모님께서는 세상을 등지셨다. 그러니 어버이날임에도 함께할 부모님이 없다는 것이 서글프기만 하였다. 그렇게 아쉬움과 후회가 점철된 세월이 흘러 어버이날 사위와 딸들에게 선물을 받고, 용돈을 받고 있다. 그러니 나는 내 부모님께 어떤 자식이었는지? 자식으로서 도리는 잘한 것인지? 돌아보니 아쉽고 아쉬울 따름이다.

 

이제 나는 더 어버이날 선물을 드리고 용돈을 드릴 부모님이 없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돌아가신 후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하였더니 내가 꼭 그 신세가 되었다.

 

오월은 그렇게 나를 돌아보게 한다. 가정의 달에 내 성장의 이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제 기다리는 것은 새롭게 맞이할 어린이날이다. 그러니 또한 오월은 여전히 설레임의 달이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미래의 나를 만난다. 언제라도 내의지로 움직이고 이동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해맑게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내 오래전 과거의 모습을 떠올린다. 내게도 저러한 시절이 있었지? 혼자 묻고 웃는다. 오월은 설레임이 가득한 달이다. 내 인생의 유월에도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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