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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6] 경인일보 "한상기 아시아문화연구원 고문님 인터뷰"

작성자 : 아시아문화연구원 날짜 : 23/02/18 12:07 조회 : 115

경인일보에 아시아문화연구원 한상기 고문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

 

 

 

 

[인터뷰… 공감] 초등 교과서속 '까만나라 노란추장' 주인공, 농학자 한상기 박사

꽃길 마다한 청춘, 후회는 없다… 남 너무 의식하면 내 본질 잊어

이윤희 기자
발행일 2019-01-16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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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굶주린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작물 개량을 위해 연구의 길을 선택한 한상기(87)박사가 23년간 아프리카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영국행 포기하고 아프리카 간 계기는

1971년 당시 내전으로 피폐 기근 심각
'식량안전으로 국위선양' 서울대 휴직

■23년간 현지서 연구생활 성과는

카사바·얌 등 품종개량 73개국에 보급
석박사 수십명 배출 '고기잡는 법' 교육


그의 삶을 거슬러 얘기하면 한편의 위인전이 된다.

실제로 그의 얘기는 1980년대 초등학교 교재 '생활의 길잡이'(3학년 2학기)에, 최근에는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어읽기'에도 소개됐다.

한 출판사가 2001년도에 펴낸 '까만나라 노란추장'이란 책은 그의 얘기를 동화로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아이들에게 큰 공감을 얻으며 47쇄나 발행되기도 했다.

외국 특히 나이지리아에선 '추장(농민의 왕)'으로까지 추대되며 신문 1면을 여러 번 장식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상까지 수차례 받아 세계적인 학자로 두루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는 바로 농학자 한상기(87) 박사다.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의료활동으로 사람들을 구원했다면, 한상기 박사는 식물유전육종학으로 이들을 구해냈다.

요즘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명예를 드높이는 이들로 나도 모르게 가슴 뿌듯해지고, 절로 자부심이 드는 경험을 하곤 한다.

베트남의 영웅이 된 축구감독 박항서,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며 전 세계적 팬덤을 형성한 BTS(방탄소년단)가 현재를 대표한다면,

 

한 박사는 1970~80년대 아프리카에서 식량난을 이겨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 추앙받는다. '한국에서 온 아프리카 성자'라고까지 불렸다.

 

 


# '일왕불퇴' 각오로 아프리카 광야에 서다

1933년 충청남도(청양군 청남면 인량리) 칠갑산 자락에서 한상기 박사는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정산향교의 전교(典校, 교장격 관리자)를 지낸 유학자인 아버지와 자식을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불공을 드리며 헌신하는 어머님 밑에서 그는 엄하게 자랐다.

어릴 때부터 농업에 관심이 많아 식물유전 육종학자가 되고자 서울대 농대에 입학(1953년)했고,

 

미국 미시간주립대를 유학해 유전육종학 박사학위를 딴 후 1961년부터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했다.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열린 것이다. 누가 봐도 명예롭고 선망의 대상인 서울대 교수직.

"그때(교수직 역임 당시) 나에게 두 갈래 길이 주어졌다. 하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초청을 받아 식물유전 육종학을 연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식량 안전을 위해 나이지리아 이바단에 창설된 국제열대농학연구소로 가는 것이었다."



그는 망설임 끝에 케임브리지행을 포기했다. 가난하고 굶주리는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작물개량을 위한 연구의 길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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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인들과 어울리는 한상기 박사. /한상기 박사 제공


서울대 교수생활 10년만인 1971년,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해 5월 그는 아이들 셋만 데리고(큰 딸은 학교문제로 한국에 남음) 아내와 나이지리아로 떠났다.

직항이 없어 비행기를 2번이나 경유하고 거의 닷새 만에 도착한 곳.

그 당시 나이지리아는 200만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1967~1970년)이 끝난 직후라 더없이 피폐하고 농토까지 황폐해져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50여만명이 굶어 죽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1971년부터 1994년까지 23년을 나이지리아에서 '일왕불퇴(一往不退, 서산대사가 한 말로 '한번 갔으면 되돌리지 말라'는 뜻)'의 각오로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일하면서 살았다. 데리고 온 아이 셋은 결국 교육문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우리 부부만 나이지리아 연구소 사택에 살면서 외롭고 쓸쓸하고 솔직히 어렵게 지냈다. 일종의 수도생활과도 같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한 박사는 그곳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주로 먹는 카사바와 얌, 고구마, 바나나 등을 연구해 기존 품종보다 병충해에 강하고 아프리카 땅에서 잘 자라는 품종으로 개량했다.

오랜 연구 끝에 수확량도 세배나 늘었고 기존보다 크기도 훨씬 커졌다.

 

그곳 사람들도 서서히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내병다수성 카사바를 만들어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73개국(토고, 가나, 카메룬 등) 농민들에게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그가 서울대를 떠날 때 총장에게 제출한 휴직계에 써낸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식량 안전에 기여하고 국위 선양을 위해 휴직코자 한다'는 당찬 꿈이 이뤄진 것이다.

1983년에는 나이지리아의 대표 부족 가운데 하나인 요루바족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헌신한 한 박사를 기려 이키레읍 '추장'으로 추대했고,

 

 대관식까지 치른 이야기는 널리 회자됐다. 추장은 이곳 농민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던 것이다.




■아프리카 경험중 유명해진 일화는

나이지리아 한 부족 '추장' 추대해줘
헌신 감사 대관식까지… 최고의 예우

■반세기만에 귀국, 수원 정착 했는데

대학시절 보낸 곳, 고생한 아내 간병
마음 달래려 시·서예 '문학상' 받기도

 

 


# '고기잡는 법' 현지 후학 배출… 그리고 귀국

그는 품종개량을 통한 기근 구제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재육성도 함께 해 나갔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순박한 마음으로 서로를 도우면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들에게 공부하고 연구할 기회를 열어 달라."

그는 국제농업기구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속한 열대농학연구소에서는 아프리카 각국의 농학자 700여명을 훈련시켜 보냈다.

 

그중 40여명이 석박사들이고, 그중 절반은 한 박사가 직접 지도한 제자들이었다.

1994년 1월 한 박사는 23년간의 생활을 마감하고 아프리카를 떠났다. 이들 스스로 농업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은퇴 이후 그는 아내와 함께 그동안 떨어져 지냈던 세 아이들과 가까이 살고자 미국 클리블랜드에 정착해 21년을 살았다.

그리고 지난 2015년 40여년의 길고 긴 타국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해 큰딸이 살고 있는 경기 수원에 자리 잡았다. 수원은 대학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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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치매에 걸려 근 10년간 허덕이는 집사람을 데리고 한국에 묻히려고 반세기 만에 귀국했다.

 

수십년을 아프리카 낯선 땅에서 나를 위해 무진 고생하다 아내가 병든 것이다.

 

내가 보살펴 줘야 한다"는 그는 매일 아내를 위해 기도한다. 그는 무겁고 복잡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기도와 시, 서예로 달랜다.

그러다 보니 시는 작품(제66회 한국문인 신인문학상 수상)이 됐고 서예는 수준급 실력이다.

기도는 '무아경(無我境, 정신이 한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에 들었을 때 적은 것이 공책 170권 분량에 달한다.

 

최근에는 그중 내용을 정리해 '나는 나이고 싶다(학자원 펴냄)'란 5권짜리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한국생활 5년차. 44년 전 고국을 떠나던 당시와 비교하면 한국은 천지개벽 수준의 발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청년들을 볼 때면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든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물질적, 향락적 사치에 너무 치우치는 것 같다.

 

남을 너무 의식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본질, 더 나아가 오늘을 있게 만들어준 전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한다.

그는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 오늘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젊은 하루를 뉘우침 없이 살게나'란

 

스승 류달영 박사의 좌우명을 빌려 젊은이들이 좀 더 자신을 돌아보고 패기를 가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글/이윤희기자 flyhigh@kyeongin.com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한상기 박사는?

▲ 1933년 8월 충남 청양군 출생

▲ 1950~1953년 대전고

▲ 1953~1957년 서울대 농과대

▲ 1957~1959년 서울대 농학석사, 국내 최초 '잡초학' 연구

▲ 1965~1967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식물유전육종학 박사

▲ 1971~1994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 구 근작물개량연구원

▲ 1982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영국 기네스과학공로상 수 상, 나이지리아 이키레읍 추장(농민의 왕)

▲ 1984년 국제 구근작물학회 우수봉사상 수상(영국 세계농업 명사록에도 실림)

▲ 1989~1994년 미국 코넬대학교 명예교수

▲ 1991~1997년 국제 구근작물학회 회장

▲ 1996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개교 50주년

▲ 2006년 브라질 환경장관 공로상

▲ 2009년 영국 생물학회 펠로상 수상

▲ 1998~2010년 미국 조지아대학교 명예교수

# 저서: '과학도를 위한 통계학(1968, 집현사)' '신비의 땅 아프리카(1990, 교육과학사)' '아프리카 아프리카(1999, 생활성서)'

'Africa 아프리카 사람 아프리카 격언(2010, 풀과 별)' '아프리카, 광야에서(2014, 따뜻한손)' '500년간 잊혔던 뿌리와 정신 찾다(2016, 학자원)'

 '나는 나이고 싶다. 5권 시리즈(2018, 학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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