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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일보] [문화와 삶] K-방역에 길을 묻다

작성자 : 아시아문화연구원 날짜 : 23/03/15 13:39 조회 : 83

[문화와 삶] K-방역에 길을 묻다

 

  •  입력 2020.12.24 19:33
 

드라마 한편을 시청하는 기분이다. 3차에 걸친 코로나 19의 확산세는 좀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불안감은 날로 커져만 가고 어찌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도 힘겹다. 코로나로 세계가 떠들썩하고 분주할 때에도 대한민국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편이다. 정부의 예방수칙을 잘 따르면서 나도 주인공이 된 듯한 뿌듯함이 있었다. 미주와 유럽 등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 소식이 전해져도 K-방역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주인공의 한사람으로서 자부심은 컸다. 그런데 2차 확산세를 겪으면서는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가?’ 의심스러웠고 더욱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콧등까지 잔뜩 끌어올렸다. K-방역에 누가 되기 싫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주변은 늘 소란스럽다.’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몇 부작인지는 모르나 성공적으로 드라마 ’K-방역‘이 성공적 작품으로 호평받고 완성되기를 진정 바라고 바랐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몇몇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세상이 요란스러워지면 K-방역은 몸을 낮췄고 더 강력한 개인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 19의 국내 확진자는 증가하였다. 왜, 이다지도 증가세는 멈추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도 의구심을 품기보다 자꾸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마스크를 눈 밑까지 끌어올렸다. 그럼에도 코로나 19 확진자의 증가세는 가히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아 어느덧 두려움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주인공의 말로는 어디일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드라마에 몰두한 탓일까?’ 내 몫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고 생각하였더니 드라마가 진행되는 순간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드라마는 아무래도 작가의 의도가 지나치게 개입되는 듯하다. 그러니 출연자도 시청자도 피로도는 높아지기만 한다. 의심하자니 드라마의 제작자도 궁금해진다.

아무래도 작가는 제작자의 의도를 수용해야 할 것인데 나는 어쩜 애꿎은 작가를 의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앞선다. 그런데 보라! T·V 앞에 시청자를 모아두는 꼴이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다. ‘차라리 시청료를 더 올려 제작자의 주머니를 채우고, 작가의 월급을 올리고, 만족에 만족을 더하시라.’ 이러한 생각에 이르렀다.

하여 묻는다.

이제는 아니다. 힘든 것은 두 번째 문제다. 두려움도 배우의 몫이고 시청자의 몫이어야만 하겠는가? K-방역에 묻는다. 제작자는 누구인가? 온 국민을 두려움 속에 가두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자는 것인가? 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읽고 들으면서 형식과 내용의 괴리를 느낀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민주화되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형식적 민주주의의 속도와 내용적 민주주의의 성숙도 사이에 큰 협곡이 형성되고 있는 느낌이다.

제각각 정치하는 이들이 펴는 논리란 정의인 듯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 믿는 사람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80년대에는 적이 명확하여 피아(彼我)의 식별이 어렵지 않았는데 이제는 쉽게 구분해내기가 어렵기만 하다. 아무래도 권력이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논리가 힘이 되는 세상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라 하더니만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수가 없다. 소인 가운데 화이부동 하는 이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할 뿐이다. 하여 묻는다. 소는 비록 잃었어도 외양간을 고쳐야 하지 않겠는가? 소를 키울 생각이라면 말이다.

김구용국 문학박사, 용인시외국인복지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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