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 of Peaceful Coexistence of Asian

아시안의 평화로운 상생을 꿈꾸다.

자료실

[중부일보] [문화와 삶] 누가 뀐 방귀인가?

작성자 : 아시아문화연구원 날짜 : 23/03/15 13:38 조회 : 78

[문화와 삶] 누가 뀐 방귀인가?

 

  •  입력 2020.10.15 19:33
 

언론의 보도를 보면 "세상에 잘 알려진 어떤 이가 방귀를 뀌고도 성깔을 부리는 모양새다." 세상의 돌아가는 본새를 보여주는데 방귀 사건을 접하는 마음이 찝찝하기만 하다. 누구나 방귀를 뀌는 것이 범죄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처음에 보도를 접할 때는 민망함 때문에 내가 뀐 방귀가 아니라 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냄새는 더 고약해지고 그나마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진 듯하다. 말하자면 방귀를 뀐 이의 이야기는 "내가 방귀를 뀐 것은 맞지만 뀌려고 뀐 것이 아니니 사과할 수는 없다."라는 의미인 듯하다.

단지 방귀를 뀐 것을 가지고 법으로 따져 묻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억지다. 그렇더라도 뀌고자 뀐 것이 아니니 안 뀌었다고 우기는 것도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은 국민적 여론이다. 국민들의 생각과 반응이 너무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왜 같은 현상과 상황을 두고도 이렇게 서로의 의견이 달라질 수 있는지 참으로 아리송하기만 하다.

"따져 물었다. 나에게"

"같은 세대의 생각은 같을 것"이라는 것은 오해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도 관심의 대상이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시간과 시대는 무수한 점으로 이루어진 선이다. 내게 바라보이는 지금의 풍경이라도 현재 나와 함께 있는 사람도 볼 수가 없거나, 보이지 않는다. 왜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그것을 못 보았는지? 따져 물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대들은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을 볼 수가 없겠지? 그러한 이유로 나 또한 그대들이 본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시간이 같다는 것, 장소가 같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하구나. 대상을 정하고, 각도를 정하고, 방향을 정하고, 보고자 하는 목적도 정하고, 보고자 하는 의도도 정하고, 정신의 맑고탁함도 정하고, 주변의 명암도 정하고 그리하여야 그렇게 모든 조건이라는 것을 다 정하여 일치시킨 뒤에 같은 것을 보아도 결코 생각이 같을 수만은 없겠구나!

함께 산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이해하는 것일 뿐인데, 이 또한 서로가 본 것이 왜 다른지를 소상히 밝히지 않으면, 따져 묻지 않으면 알 수가 없겠구나? 왜 다른지는 알 수가 없겠구나? 그런데도 우리는 다르다는 이유로 다투고 있겠구나.

법인가? 관습인가?

언제부터인가 나는 법을 믿지 않게 되었다. 법이란 힘 있는 자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것이지 법이 제정된 배경도 적용의 공정성도 이미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지식을 정치인들로부터 배웠다. 권력이 있으면 유죄가 무죄가 된다는 사실과 경제력이 있으면 무죄도 유죄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단지 방귀를 뀐 문제였다면 이를 법으로 해결하려던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단지 방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면 법은 법대로 공정하지 못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주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 먹먹하다.

관습적으로 본다면 사과하고 민망하다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법으로 무죄라 하였으니 이제는 떳떳하다고 으스대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관습이고 법이라는 말인가? 그리하여 또 세월이 흐르고 나면 무죄는 유죄가 되고, 유죄는 무죄가 되는 또 그런 세상의 이치를 통하여 국민은 단단하게 단련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그러한 세상을 정녕 원치 않는다.

김구용국 문학박사, 용인시외국인복지센터 센터장

[문화와 삶] 누가 뀐 방귀인가? < 문화와삶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joongboo.com)